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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 중 많은 이들이 국내 여행지로 제주도를 최고로 꼽는다고 한다. 하지만 쉽게 마음을 결정하지 못한 것은 시간과 경비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제주도에 가면 보고 즐길거리가 풍성하다. 오염되지 않는 깨끗한 바다와 해변과 기암괴석, 오름(기생화산)과 곶자왈(숲)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은 대부분의 여행자들에게 오기를 잘했다는 만족감을 갖게 해준다. 이런 제주도에서도 가장 제주도의 모습을 많이 지니고 있어 찾아볼 수 있는 곳은 8개의 유인도 중에서 바로 우도다. 우도는 제주도의 또 다른 속살이라고 불릴 만큼 제주도를 가장 많이 닮았다. 우도는 성산 일출봉 남쪽 바다 앞에 떠 있는 섬이다. 성산포에서 3.8km, 여객선으로 10분이면 닿는 거리에 있다. 성산포 일출봉에 갔다가 찾게 되는 곳이 우도다. 면적 6.18km2, 해안선 길이 17km로 제주도의 63개 부속도서 가운데 가장 큰 섬이다. 우도의 경지 면적은 우도 전체 면적의 약 71%로 마늘, 땅콩 등을 재배하고 있다. 또한 해녀들에 의한 해산물 채취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도의 해녀들은 일찍부터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물질을 하기 위해 우리나라 서남 · 동해안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해안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한다. 여의도 3배 정도 크기의 우도는 작은 제주도라 불리는 화산섬이다. 현무암질 용암 위에 크레이터체인 소머리오름 응회구가 존재하며, 이 응회구의 화구 속에 분석구(噴石丘)를 갖고 있는 이중 화산에 해당한다. 종달리와 성산포항에서 우도로 이어지는 우도수도(牛島水道)의 수심은 20~30m이며, 연안으로부터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반은 주로 견고한 암반형이고 갯골이 발달해 있다고 한다. 우도에는 고인돌과 동굴 집자리 유적이 남아 있으며,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것은 1843년(헌종 9)경부터이다. 그 전부터 우도에서 생산되는 해산물을 채취하기 위해 본도의 인근 마을 주민들의 왕래가 있었다. 특히 1697년에 말을 사육하기 위한 국영 목장인 우도장(牛島場)이 설치되면서부터 국마(國馬)를 사육하기 위해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그 후 1823년(순조 23)부터 인근 백성들이 우도 개간을 조정에 요청하자 1842년(헌종 8)에 허가가 내려졌다. 이에 따라 1843년(헌종 9) 봄부터 우도 개간과 이주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844년(헌종 10)에 김석린 진사 일행이 들어가 동남쪽 들에 정착한 것이 우도 역사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우도는 소가 머리를 내민 모양(牛頭形) 또는 누워 있는 모양(臥牛形)이라 해서 ‘소섬’ 즉 우도로 명명된 곳이나 1900년에는 향교 훈장 오유학이 물에 뜬 두둑이라는 뜻의 ‘연평도’로 개명하여 현재까지 연평리로 불리고 있다. 1986년 4월 1일에 우도면으로 승격되었다. 현재는 4개 행정리에 12개 자연 부락으로 나누어져 있다. 4개 행정리는 천진리, 서광리, 오봉리, 조일리 등이다. 면사무소, 숙박 시설, 종교 시설, 등대박물관, 연평초중학교, 보건소 등의 시설이 있다. 반농반어(半農半漁)의 전형적인 농어촌 마을이다. 1932년 해녀항쟁은 전국에서도 유례없는 대대적인 여성집단의 항일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일제시대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은 해녀어업조합을 거쳐 판매하게 되는데 당시 판매대금의 약 50% 이상을 조합과 야합한 상인들이 수수료라는 명목으로 착취하고 있었다. 이런 불합리함에 마침내 1932년 1월 12일 수백 명의 해녀들이 우도 구좌읍 세화리에 모여 항일봉기를 단행했다. 이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95년 12월 9일 동천진동 포구에 해녀상과 해녀가를 새긴 해녀노래비가 건립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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